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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 ​감각을 의심하라 - 박기원 개인전 <연속> 리뷰

  우리는 흔히 각자의 경험 안에서의 공간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공간은 같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피부로 직관하는 공간의 분위기, 질감, 공허함, 숨 막힘, 반짝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도면 위에 수치로 존재하는 구조를 바라보는 것만큼 본질적이지 않다고 학습해 왔다. 사실, 소실점을 중심으로 공간을 계산하는 방식 이전에는 심리적 거리, 정동의 크기, 서사의 순서와 같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기준들을 바탕으로 공간을 재현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지난 수 세기 동안 시각을 신체에 포진한 다른 감각들로부터 분리시키고 더 본질적인 것으로서 위계에 차이를 두어 온 시각중심주의는,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공간과는 별개인 인식으로 재구성되는 객관의 공간이 존재한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원론에 비추어 보면 박기원의 전시 <연속>은 기하학적인 평면과 촉각적인 설치의 명료한 대립항으로 구조 지어지는 듯 보인다. 건축의 구조를 투영하여 반복하는 회화 연작과 그 구조를 유예시키거나 이완시키는 설치 작업이 교차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공간을 둘러싼 벽과 바닥이 물렁해지거나 반투명해졌다가도 이내 그림이 걸린 벽 앞뒤로 기둥과 보의 모서리가 날카롭게 서는 것을 느낀다. 전시는 나를 공간의 내부에서 구조의 앞으로, 다시 기하학적 평면으로부터 몸을 둘러싼 물질들의 연쇄 속으로 반복적으로 전치 시킴으로써 고정되지 않는 공간 안에서 감각을 의심하게 한다.

 

  먼저 신체에 분산된 촉각과 주변적 시각으로 경험되는 설치 작업들을 살펴보자. FRP 패널, 흡음재, 안전테이프, LED 빛 등의 산업재들이 구조의 일부로 위장하여 건물에 스며들어있다. 자연스럽게 공간의 구조에 편입된 이들은 공간 안에 들어선 관람객을 자기의 내부, 정확히는 자기 효과의 장으로 끌어안으며, 시각적 인지를 위해 대상과 두어야 할 최소한의 거리를 위반한다. 설치의 개입은 정적인 건물 내부의 공기와 빛, 에너지의 흐름, 채워짐과 비워짐을 가시화한다. 그럼으로 유연하게 경험되는 공간은 고정된 이미지로 객관화되지 않는다. 공간은 이제 시각적 인지를 통해 기하학적 구조로 구축되는 대신에 즉물적인 촉각과 미세하게 떨리는 주변적 시각, 그리고 흔적으로 남겨진 시간성이나 에너지의 변화를 감지하는 직관을 통해 총체적으로 경험되며; 도면으로 이미 존재하는 공간 그 자체가 아닌, 개별적 신체에 물질적으로 포착되는 현상이 된다.

 

 전시장 입구에 붙은 안내문의 지시대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간다. 바닥에 깔린 검은 피라미드형 흡음재는 전시장을 들어서는 순간 발에 감기는 촉각으로 가장 먼저 경험된다 (<피라미드 바닥> 2019). 신발 안에서 좀처럼 자극에 노출될 일 없던 피부의 감각은 발에 닿는 사각뿔의 꼭지점들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스펀지의 표면에 균질하게 솟아있는 기하학적 구조들은 발아래 조용하게 바스라지며 견고한 바닥을 딛는 충격을 완충시킨다. 검은 피라미드의 바닥은 후퇴하는 구조이자, 구조를 이완시키는 개입이다.  

 

  그대로 문 앞에 서서 검은 바닥으로부터 시선을 올리면, 갤러리 중앙에 뚫린 복층 홀의 높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구겨진 안전테이프가 눈에 들어온다 (<X 모빌> 2019). 한쪽 벽에는 홀의 바닥에 격자로 부착되어 있던 그 테이프가 구겨져 뭉쳐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진이 걸려, 비닐 덩어리 안으로 사라진 어떤 질서에 대한 흔적을 남긴다. 전시장이라는 무중력의 공간 안에서 이 레디메이드 산업재는 파편화된 기호로서 이미 물화 되었을 테지만, 여전히 노랑과 검정의 규칙적인 배치 안에 경고의 의미를 체화한 채로 공간에 배치되는 새로운 질서(사선과 직각의 그리드)를 강렬하게 새기고 있었다. 이제 격자도, 격자를 품던 바닥도 모두 보이지 않게 된 홀 안에서 나는 한 아름의 노랗고 검은 비닐 덩어리와 함께 그 물질의 표면과 배치에 기입되어있던 질서들이 모두 물러난 큰 공백을 마주하게 된다. 테이프, 와이어, 스테인리스 스틸로 이루어져 지름 130cm라는 이 조형물은, 그 덩어리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는 질서와 무질서의 간극, 또는 엔트로피의 낙차를 열어 보이며, 시각적 인지 너머 어떤 확장적인 경험을 가능케 한다.  

 

  2층, 입구에 선명한 붉은 색이 배어있는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가면 밝은 빛을 뿜는 벽, 아니 붉은 빛 앞에 드리운 비닐 장막을 마주한다 (<레드룸> 2019). 견고한 벽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발하는 빛은 벽을 어디론가 후퇴시켰고, 반투명의 장막에 끼어있는 붉은 연무는 시정을 악화시키며 장막 뒤 공간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비닐에 가까이 갔다 물러나면 내 몸을 따라 이는 바람이 비닐을 펄럭이고, 흐르는 공기가 빛과 어둠이 묻어 있는 것들을 움직이며 공간과 나의 관계를 가시화한다. 이제 공간은 나의 존재와 분리되어 눈앞에 놓이는 구조가 아니다: 나의 몸을 둘러싼 미세한 물질들의 연쇄로서 나의 반응에 화답하는 정동이다. 

 

  한편, <X 모빌>이 걸린 홀에서 이어지는 1층 전시실에는 스펀지 바닥 위로 솟은 흰 벽에 <넓이> 두 점이 걸려 있다. 몇 개의 대각선으로 분할된 캔버스 위 색면들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모서리들과 그 그림자들이 흰 벽 위에 그리는 패턴을 회화의 평면 위에 반복한다. 프레임 안의 사선들이 어떤 모서리, 지평선과 수평선을 담은 공간에 대한 환영을 구축할 때, 프레임의 밖에서는 기둥과 보와 몰딩의 모서리가 납작한 벽 위에 쌓이며 회화의 소실점을 향해 내달리는 것 같다. 그래서 스펀지 바닥 위와 붉은 방 안에서 신체를 둘러싼 물질의 연속으로 채워졌던 전시장은, 이제 시선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둔 벽 위의 기하학으로 물러나며 일순간에 투명하게 비워져 버린다. 전시장과 전시장을 잇는 계단과 난간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그림들은 구조가 물렁하게 느껴질 때쯤 눈앞에 나타나 견고한 그 구조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러나 공간 안에서 전개되는 이러한 촉각과 시각의 변증법은 인식으로 재구성되는 공간을 몸에 닿는 공간으로부터 분리하거나, 시각적 인지를 살에 닿는 촉감으로부터 분명하게 떼어 놓는, 구태의연한 구조의 확인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질적인 감각들이 연쇄적으로 촉발되는 과정에서, 시각의 충격은 촉각의 여운을 만나 공간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 안에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감각으로 경험된다. 캔버스의 안과 밖에 모서리와 꼭지점을 쌓아 올리며 공간의 구조를 끌어당겼다 밀어내는 회화 또한, 스펀지의 바닥과 붉은빛이 그러했던 것처럼, 건물의 일부가 되어 움직이며 공간에 대한 감각을 교란한다. 나의 걸음과 바라봄과 숨 쉼과 다가감 안에서, 공간은 부드러워졌다 후퇴하였다 흘러갔다 가득 채워졌다 비워진다. 시각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경계를 지키며 본질적인 것의 지평 위에 자아를 굳게 고정해주는,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감각으로서 여타의 감각들과 구분 지어지지 않는다. 공간은 존재와 함께 움직이며, 시각은 그 움직임을 포착하는 많은 감각 중 하나일 뿐이다. 분절되지 않는 감각의 총체적 경험 안에서 존재의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고 보면 <연속>은 단절된 공간과 공간을 잇는 전시의 동선일 뿐 아니라, 분절되지 않는 피부의 영역들을, 계층적 관계로 구분 지어 질 수 없는 감각의 기관들을, 몸 안에서 잇는 존재의 총체성이다. 

 

  이제 우리는 시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이 본래 촉각적 감각의 연장이었다고 말한다: 모든 감각기관은 특화된 피부세포일 뿐이며, 모든 감각적 경험은 촉각의 분화된 양태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주하니 팔라스마, <The Eyes of the Skin>). 시각은 더이상 촉각과 분리되지 않으며, 피부를 둘러싼 세계와 접촉하는 종합적인 경험의 일부로서 존재의 일관적인 경험에 일조할 것이라 믿어진다. 그래서 만지는 것으로 보는 것을 보완하며 개인에게 특별하고 유일한 경험을 구축할 것이 장려된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각적 재현 장치 너머의 평면적 세계와 몸 담그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현실 세계 사이를 위화감 없이 오가는 우리는 이원적인 삶의 태도에 어느새 다시금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각적 평면과 신체적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느끼는 현기증은 과연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진단을 내려줄 수 있을 것인가. 

 

  온과 오프의 삶의 태도가 편리한 선택지로 주어지는 하이브리드의 세계는 사실 무한한 불연속적 감각의 자극 속에서 간극 그 자체에 무뎌지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것이 가장 매끈하게 연결 되었다는 환영 속에서, 연속적인 존재로서의 경험은 사실 어느때보다 더 요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시각중심주의적 위계가 더이상 몸의 감각을 은폐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지금도, 우리는 전시 속 미묘한 공간의 움직임 안에서 이질적인 감각들이 부딪치고 뒤섞이는 경험에 놀라워 한다. 아니, 시각이 몸의 다른 모든 감각들과 마찬가지로 편리한 대로 취사 선택 할 수 있는 불연속적 감각의 가능성으로 주어질 뿐인 오늘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소환된 감각들이 교차하는 연속의 경험은 더욱 큰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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