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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  김대환展, 김정헌展: 시각의 회색지대

 김대환의 전시가 있는 풀의 마당이다. 전시장 외벽에는 세 개의 프레임이 삼단의 이미지를 매개한다. 벽을 채우는 파란 웹 드로잉의 중앙에 네모난 유리창이 뚫려 있고, 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실내는 창밖을 향해 놓인 스마트폰의 화면에 생중계된다.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와 반대편 쪽으로 걸어갈 때면, 스크린 속 그의 몸집은 점점 자라 머리가 천장에 닿아 버린다. 유리창 너머 보이는 사람은 방을 가로질러 걸을 뿐인데, 매일같이 우리의 시각과 기억을 보조해주는 저 매체는 어째 그의 크기를 심하게 왜곡시킨다. 이 이중의 창은 우리에게, 저희 둘 중 하나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잘하는 친구>).

 

 보이는 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천장이 낮아지고 바닥이 솟을 뿐인데, 공간을 기준으로 하는 인체의 크기가 달라 보인다. 평면들을 기울이고 찌그러뜨려 소실점의 중력을 흐트러뜨려 놓은 덕분에, 네모난 방을 공간적으로 개념화하는 일상적인 감이 어긋나 버렸기 때문이다. 감각보다 빠르게 공간을 구조화하는 우리 의식은 매번 새로운 곳에 놓일 때마다 주어진 공간의 깊이를 계산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대단히 편리한 것이다. 내딛는 걸음마다 발을 디뎌보거나 앞을 더듬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외부세계를 보편적인 인식의 틀로 재구성 함으로써 이미 효율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스스로의 기제를 원형 삼아 인공신경망을 만들고, 창이 있는 벽의 저 푸른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기계는 기호와 비-기호의 구분이 없는 신호 안에서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찾아내도록 훈련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외부세계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처럼, 입력되는 이미지에서 학습된 패턴을 찾아낸다. 다만, 우리 눈에는 쓸모없는 소음으로써 소거되어 버리는 신호들마저 기호로 매개해 버리는 이 알고리즘은 파란 하늘에 흰 구름뿐인 사진에서도 눈과 파충류와 강아지와 기하학적 형태들을 찾아내어 영 기묘해 보이는 그림을 그린다. 우리의 시야에는 드러나지 않는 비-기호들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이 세 개의 프레임은 다시금 우리에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느냐고 묻는다 (<구름에 우리 강아지 나>). 김대환은 이렇게 일상적인 인식의 틀 안과 밖에서 패턴으로 드러나는 것들과 소음으로서 가려지는 것들의 경계에 주목하며, 우리의 의식이 세상을 표상하는 방식에 대한 의심을 촉구한다. 직관을 기만하는 인식적 틀이 빈틈을 열어 보이던 원근법적 착시와 중첩된 거울의 방에서, 매체로서의 인간 자신의 불투명함을 목격했던 것을 기억해 두자. 

 

 

 김정헌의 전시 <분열된 측정, 정신적 활동성> 또한 세상에 스스로를 투사하고 통찰하는 우리 정신의 임계와 가능성을 탐색한다. 작가는 인간의 경험을 투사하여 자연을 매개하는 인간 중심적 시각의 외연에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던 (비)가능성의 차원을 포착한다. 죽은 나무 기둥에 서식하는 붉은 거미 진드기의 생태를 관찰하던 작가는 진드기들의 행동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패턴을 발견한다. 그리고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장 높은 곳을 향해 기어오르는 저 무리의 추동을 권력의 정점을 향해 끝없이 기어오르는 인간의 욕망으로 의인화한다. 영상 <0.01 x 100 소실점의 끝>에서는 까만 하늘에 솟은 솟대, 그 꼭대기에 걸려 있는 강한 빛, 엄숙하게 울리는 종소리 등의 영화적 장치들을 프레임에 끼워 넣음으로써,  진드기들의 시점에 근접해 가는 카메라의 시선 위로 우리 스스로의 서사를 극적으로 중첩시킨다. 

 

 이 작은 세계를 포착하기 위해 바짝 끌어당겨 진 카메라의 프레임은 나무 기둥의 주름과 구멍들, 이끼의 질감과 공기의 점도까지 생경한 스케일로 확대해 보여준다. 일상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 시각의 장을 들여다보면; 이 미시적 세계 또한 골짜기와 꼭대기, 음지와 양지, 생명의 주기와 시간의 흐름, 개체와 무리, 움직임 그리고 욕망으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한다. 흥미롭게도 김정헌은 꼭대기를 향한 이 작은 타자들의 시선에 지극히 인간적인 드라이브를 투사하는 동시에,  그들을 저들만의 소실점을 향하는 시선의 기준으로 상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고, 동일하지만 곧 타자인 새로운 경계적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러고 보면 전시장에 걸려 있는 십수 점의 그림 위에서도 기호이지만 의미로 엮이지 못하고, 소음이지만 의미를 잠재하고 있는 모순적 가능성들이 실험되고 있는 듯하다. 형태들이 숨어있는 프레임은 인지를 위해 차이를 분할하는 구조 이전에 존재하는 정글과도 같다. 프레임 안에는 물결, 불꽃, 연기, 신경망과 식물의 뿌리, 흘러내리는 점액질, 내장과 벌집의 주름, 귓바퀴, 털, 얼굴, 섬광, 그리고 눈과 알이; 원, 삼각형, 대칭적 구조들, 반복적으로 말려 들어 가는 곡선과 그 굴곡에 담겨있는 음과 양, 피라미드와 구, 일출과 일몰의 다이어그램 같은 것들과 차이 없이 뒤섞여 있다. 유기체의 형상과 기하학적 요소들, 천체적 도상과 신체의 흔적들, 음영의 재현과 추상적인 패턴들은 구조적 서열이나 서사적 위계 없이 비선형적으로 평면 위에 펼쳐져 있다.

 

 프레임 위의 모든 부분을 빈틈없이 기호들로 채운 그림의 표면에 아직은 어떤 형태도 떠오르지 않는다. 작가는 능숙하게 이름 있는 것들을 이름 없는 것들과 대칭으로 늘어놓거나, 살아있는 것들을 정적인 것들의 사이에서 반복시키고, 격자로 갈라놓음으로써 어느 한 부분으로 중력이 쏠리거나 어느 한구석이 비-기호로서 가라앉지 못하게 하였다. 모든 것이 기호로서 평등하게 가능한 평면은, 아무런 패턴도 찾아지지 않는 완전한 소음의 장과 마찬가지로, 인지를 위한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외부가 부재하는 전체는 내부가 부재하는 전체와 같다.) 기호와 비-기호의 경계 없는 상태는 선험적 의미 구조를 투사함으로써 외부 세계를 의미화하는 의식으로는 매개되지 않는다.  

 

 전시장의 가운데에는 이끼가 깔린 방이 있다 (<에코 다이나믹스>). 이끼 위에는 동물의 뼈, 구워진 광물, 박제된 새, 유리, 철, 레진과 같은 물질들이 회화 속 소음을 입체의 형태로 재현한다. 여기서도 형태가 있는 것과 형태가 없는 것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다. 화살촉과 벌집처럼 사람이 만든 형태와 자연이 만든 형태가 계통의 구분 없이 뒤섞여 토템을 쌓는다. 시선은 내부와 외부, 그리고 미시와 거시의 세계를 오고 간다. 외부 세계를 절대적으로 매개하는 인간 척도는 이곳에서 유효하지 않다. 견고하게 고정된 기준으로서 타자를 통찰하던 인간 시선은 이곳에선 투명한 매체로서의 권위를 갖지 못한다. 작가는 영상, 회화와 설치를 담아내는 분열적인 시선을 통해 인간 중심적 틀을 넘어서는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던 우리 인식의 틀은 결코 투명하게 세상을 담아내는 매체가 아니었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우리의 경험과 욕망이 투영된 언어의 그림자일 뿐이다. 더이상 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게 된 인간이 어떻게 신의 세계를 매개하지 못하는 과학의 언어로 온통 세상을 분석해 버렸는지 기억해 보자. 우리의 시선이란 보고자 하는 것을 외부세계에 강요하는 막강한 권력의 행사이다. 기계와의 연대가 일상화되고 (감각을 연장시키는 보철기관들과 불가능의 영역을 밝히는 재현기술이 일상적으로 보급되고) 타자들에 대한 인간의 파급력이 급격하게 통제 불가능해지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던 대로의 세계는 빠른 속도로 변형된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이러한 놀라운 세계의 변형을 다루기 위해서는 공통의 참조점과 가치들을 찾아내기 위한 새로운 틀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두 작가는 우리의 시야, 시각, 인식 틀의 경계에서 발견되는 저 회색 지대에서 정신의 활동성이 확장되는 새로운 틀의 잠재된 가능성을 모색해 본다. 

 

 다시 김대환의 전시로 돌아가 보자: 벽에 걸린 것과 포장지에 싸인 채 바닥에 포개어진 것, 무언가들이 들어찬 공간과 비어있는 공간, 조명 달린 벽의 안쪽과 벽 바깥 어두운 복도: 전시의 경계 외부에 감춰져야 할 것들이 전시된 것들의 사이사이에 펼쳐 드러나 있다. 전시장의 뒷면에서 발견한 삼두상을 떠올려 보자. 전시로 불러들여 진 것들은 전시 아닌 것들과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곳곳에 솟은 볼라드와 마룻바닥 조각들, 벽에서 튀어나온 손잡이-거치대, 두서없이 방위를 가리키는 마카 펜들과 허공을 반사하는 거울이 동선을 가로막고 시선을 분산시킨다. 전시는 매체 자신의 규범 (예컨대 오브제에서 오브제로의 효율적인 시선 이동을 위해 매끈하게 짜여진 동선)을 교묘하게 넘나듦으로써 스스로를 흐릿하게 드러낸다. 이 회색의 지대에서는 매체의 환영, 그러니까 투명한 그 틀 안에 미술과 의미와 가치가 담보되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정지된다 (<잘하는 친구의 친구>). 

 

 외벽에 매체들의 제단을 봉헌하고, 유리창에 유토로 낙서를 남기고, 동선을 방해하고, 시선을 방해하며 자기를 규정하는 동시에 해체하는 ‘전시’는 <안녕 휴먼?>이라 인사를 건네며 우리 앞에 슬쩍 제 모습을 드러낸다. 스스로의 의식 안에 외부세계를 투명하게 재현한다고 믿고 있는 인간들에게 우리 시각의 불확실성과 함께 불투명한 매체로서의 자기 실체를 드러내 보이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체로서의 인간 자신을 너무 맹신하지 말라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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