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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 욕망하는 몸: Sarah Lucas 개인전 <Supersensible, Works 1991-2012> 리뷰

 

 90년대 초 런던을 떠들썩하게 했던 YBAs의 무리 중에서도, 가장 거칠고 도발적인 인물로 회자되었던 사라 루카스의 개인전이 10월 말, 제이슨 함 갤러리에서 막을 내렸다. 초기의 자화상과 시시껄렁한 성적 농담들에서부터 비교적 근래의 다소 추상화된 조각까지 작가 작업 세계의 여러 맥락을 보여주는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성북동의 하얗게 정돈된 갤러리에서도 여전히 루카스의 작업은 퇴폐적이거나 저질스러우면서도 강렬한 길거리 마초의 태도를 내려놓지 않았다. 

 

 전시 동선의 정 중앙, 어두운 사진의 프레임 안에는 하얀 팬티를 입은 골반 한가운데에 닭고기 한 마리가 누워 있다 (Chicken Knickers, 1997). 닭의 몸통에는 입술처럼 길게 갈라진 틈이 음란하게 벌어졌다. 그 검은 구멍 아래로 희고 가는 소녀의 다리가 이어진다. 곧게 뻗은 앳된 몸, 하얀 속옷의 청량한 색감, 레이스 장식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빛에서 이어지는 시선이 통통하게 벌어진 닭의 살 표면에서도 형태적 즐거움을 탐닉한다. 비계가 오른 살에 축축한 피부의 질감이 노골적으로 외설적이다. 외음부와 먹음직스러운 것은 포르노그라피 안에서 익숙하게 결합되고 병치되어 온 기호이다. 닭 고기의 벌어진 틈에서 여성의 외음순을 보게끔 하는 것은 성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보다 은근한 충동을 부추기는 것이 분명하다.

 

 외음부의 형태로 도드라지는 닭의 몸통은 맥락을 떼어버린 여성 성기의 이미지이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의미와 가치, 규범 등 성(sex)의 흔적들을 들어내고서 여성의 거기는 다시 고깃덩어리의 상태로 돌아갔다. 대체 이 고깃덩어리의 어디에 성이 있단 말인가? 저 주름과 질감의 형태를 탐닉하는 행위 어디에 성이 있단 말인가? 사라 루카스의 닭고기는 거기에 욕망을 투사하는 모두를 비웃는 듯 태연하고 대담하게 소녀의 몸 위에 드러누워 있을 뿐이다. 성은 없는데도 욕망으로 충만한 이 이미지는 몸에 이름과 의미와 가치를 덧씌우는 성이라는 관념은 어디에서 오는지 뻔뻔하게 묻는다.

 

 이분법적 성의 제도를 불편하게하는 작가의 태도는, 그러나, 피해자로서 가해자인 남성의 권력을 고발하던 오래된 페미니즘의 입장과는 분명 다르다. 피해자로서의 여성 일반을 범주화하는 오래된 전제들은 종종 욕망 그 자체를 젠더화 함으로써 여성을 욕망으로부터 소외 시켜 버리곤 했다. 이분법적 구조 안에서 욕망은 남성적인 주체의 가능성과 동일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 욕망 주체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이러한 전제는 여성을 객체에 고정시켜버림으로써 이분법의 구조를 견고하게 할 뿐이다. 사라 루카스는 오히려  피해자와 가해자, 응시의 주체와 피사체, 욕망의 주체와 욕망의 대상, 의미와 이미지가 반듯하게 분리되지 않은 날 것의 이미지를 던져 놓음으로써 합리적인 논리와 이분법적 구조의 담론을 도발한다.

 

 격자를 이루는 네 장의 사진에는 발가벗은 남자가 의자에 앉아있다 (Get Off Your Horse And Drink Your Milk, 1994). 동그란 비스킷 두 개와 우유병을 고환과 남근의 자리에 두었다. 네 개의 연달은 사진 안에서 우유병을 손에 잡고 위, 아래 좌우로 움직이는 남성 피사체는 남근의 주인, 자위의 행위자로서 언제나 욕망의 주체인 동시에 비스킷과 우유처럼 먹음직스러운 일상적 욕망의 대상이기도하다. 남근을 일상적인 (남근에 매달려있던 인본주의 전체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그림문자로 환원시켜버리고 마는 작가는 대상을 탐닉하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시선을, 이 섹드립의 유희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석고로 본을 뜬 남근, 한 쌍의 오렌지 사이에 솟은 오이, 딜도, 성냥으로 만든 남근, 철사로 만든 남근, 거품 뿜으며 터지는 맥주캔, 종이로 만든 남근, 남근을 상징하는 손가락, 바나나와 소시지, 손잡이가 달린 남근, 거꾸로 선 남근, 기울어진 남근, 좌대 위의 남근 등등 수없이 많은 남근을 만들며 남근에 대한 페티시를 숨김없이 드러내 온 작가는 욕망의 주체가 되는 것을 결코 망설이지 않는 듯 하다. 마치 성을 위하여 욕망을 통제할 것이 아니라 욕망을 위하여 성이라는 원본 없는 표상을 지워야 한다고 주장하듯이 하나의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외설적인 이미지들을 마구 만들어낸다.

 

 그래서 전시장 안에 보여지는 모든 것은 성욕의 대상으로서 발가벗겨진 동시에 성욕의 주체로서 꿈틀거린다. 욕망의 대상으로서 언제나 객체화 되고 마는, 절대적인 타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의 욕망에는 젠더가 없다. 욕망에는 방향성 없는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팬티스타킹에 솜을 채워 만든 일련의 조각들을 보라. 언제나 이미 성적인 의미로 충만한 스타킹의 물성에도 불구하고, 물렁한 양감과 구부정한 형태로 바닥을 더듬는 발끝은 섹시한 여성의 것이라기보다는 미지의 촉수에 가깝다. 천정에 불안하게 매달린 플라스틱 의자에는 ‘여성의 몸’이 무력하게 묶여 있다 (Loungers #2, 2011). 솜을 채운 스타킹의 다리가 의자에서 길게 늘어지고, 그 엉덩이 아래 붙은 양동이 밑으로는 둥그런 스타킹 덩어리 두 개가 젖가슴 한 쌍처럼 늘어져 내린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천정의 의자를 두 팔로 감아쥔 ‘남성의 몸’이 상승하는 것이기도 하다. 양동이 밑에 달랑이는 둥근 것은 젖가슴이었다가 고환이 되고, 의자에 묶인 검고 긴 것은 힘없이 늘어진 다리였다가 고집스럽게 지탱하는 두 팔이 된다. 이 형태 안에서 하강하는 여성성과 상승하는 남성성의 루프는 무한히 왕복할 수 있다.

 

 동적인 것은 규정할 수 없다. 수직으로 쌓아 올려진 육면체의 콘크리트 블록에는 스타킹이 팽팽하게 당겨져 터질 듯 위태롭게 씌워져 있다 (Spirit of Ewe, 2011). 스타킹의 사타구니께에는 암양의 해골이 그 위협적인 이빨로 스타킹을 뚫었다. 그것은 사정없이 발가벗겨져 전시된 사타구니를 관통하는 것인 동시에 거세를 위협하는 괴물, 이빨을 가진 질(vagina dentata)이다.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오렌지이자 젖가슴이고, 빵 덩어리일 뿐이지만 사실은 발기한 남성기이다 (Untitled, 2000). 스타킹은 페티시의 오브제이자 다리의 살갗이고, 여성의 신체를 거침없이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작가는 가학적인 동시에 피학적이다.

 

 규정되지 않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구조에 긴장감을 일군다. 주체와 객체 관계의 전복, 위상의 낙차, 시선의 투사. 조그마한 떨림이라도 움직이는 것에는 욕망이 감지된다. 여성으로서의 작가 자신과 남성성의 이미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루카스의 자화상은 따라서 강한 욕망으로 충전되어 있다 (Divine, 1991; Supersensible, 1994-5). 남성의 기호와 여성의 몸 사이를 오가는 이미지는 어느 하나에 고정되지 않은 채 서로를 (스스로를) 욕망한다. 젠더의 규범을 부정하고 성의 정체성에 도발하는 이미지는 더 나아가 자화상이라는 재현 양식의 전복으로 나아간다. 자화상이라 부르지만 사실 사진을 찍은 것은 작가의 가까운 타인들이다. 상황을 제어하며 카메라를 통해 피사체를 포착하는 시선의 주체는 루카스 자신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냄에 있어서도 작가는 자화상의 고정된 양식을 따르지 않으며 관음(voyeurism)의 피사체와 자기 재현의 마니페스토 사이에서 주체와 객체의 역할을 뒤섞어 버린다.

 

 거만하게 뒤로 기대어 앉아 다리를 쩍 벌린 남성적 이미지는 작가 시그니처의 포즈처럼 자화상의 맥락 안에서 여러 번 수행된다. 가죽 잠바, 청바지, 흰 티와 담배는 카메라의 응시를 정면으로 되돌려주는 그녀의 시선과 함께 어떤 남성성의 전형을 재현한다. 사진에 보이는 그녀는 아주 능숙하게 남성의 젠더를 수행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젠더를 성별화된 몸의 필연적 표상이라 전제하는 다소 진부해진 편견들을 여전히 위협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떤 사내보다 더 사내 같은’ 여자임을 과시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이 여자인 루카스의 몸을 더욱 철저하게 객체화함으로써 ‘거기에 분명히 있는 것’으로서 드러내고 마는 것만 같다. 콘크리트 부츠, 남자 팬티, 자위하는 팔, 맥주, 담배, 음담패설처럼 남성성에 맞닿은 기호들로 가득 찬 전시장 안에서 우리는 그 모든 기호 뒤에 있는 작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미지는 몸과 그 표상 사이에서 진동한다. 그것이 섹스이든 젠더이든 섹슈얼리티이든 우리는 전시장에서 감지되는 것들의 유일한 참조점으로서 아직 성별화되지 않은 하나의 몸을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성별을 가진 몸과 성별을 가진 욕망, 성적 이미지의 모든 표상들은 결국 그 모든 것들에 앞서 있었던, 고깃덩어리로서의 몸이라는 유일한 지지체 위에 투사된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닭 고기의 사진 맞은편, 이중의 좌대 위엔 분홍색 소시지같이 길고 둥근 것이 뱀의 몸처럼 꼬아져 있다 (HARD NUD, 2012). 스타킹을 솜으로 채워 만든 길고 몽근한 것을 청동으로 주조하여 콘크리트 블럭 위에 올려놓았다. 통통하고 따뜻한 솜 내장의 질감을 차가운 청동의 표면에 담았다. 부드럽고도 견고한 이 형태의 한쪽 끝은 자기 자신을 애무하듯 감아 올라 반대쪽 끝에 난 구멍 안으로 뚫고 들어간다. 수컷이자 암컷이며, 양이자 음이고, 주체이자 대상인 이 자웅동체의 상은 좌대 위의 정지된 시공간 안에서도 폭발적으로 외설적이다. 이름을 갖지 않은 몸이지만 매우 선정적이다. 성이 기입되지 않은 이 물질에는 성이 가득 차 있다. 그럼 다시, 성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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