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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아: 빛 안의 검은 잔상 

 

 언제부턴가 현실은 우리에게 우울할 틈을 남겨 두지 않았다. 목적지에 가장 빠르게 도달하는 길을 실시간으로 계산해주는 기계들은 길잃음의 경험을 애초에 차단 했으며,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 들기 직전까지 눈 앞에서 발광하는 디바이스들은 내면의 어둠으로 침잠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관계의 기억들이 데이터로 복원되고 공간의 분위기가 필터로 채색되는 현실에선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 아니라 현실을 과도하게 채운 것들에 대한 피로감이 문제가 되었다. 그렇게 그림자에 머물며 어둠을 곱씹던 멜랑콜리아는 더이상 이야기되지 않는 듯 했다.

 

 그러다 서윤아의 검은 그림들 앞에서 사라졌다고 여겼던 멜랑콜리아의 유령을 마주하였다. 장지 위에 힘없이 바스라지는 목탄을 공들여 쌓아 올린 검은 그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 매끈한 표면들의 층을 쌓으며 기계적 생산을 재현하는 빠른 이미지의 시간에서 빗겨난 잊혀진 그림자 같았다. 둔탁한 형태로 검뿌옇게 그려지는 그림들은 가장 높은 해상도로 가장 선명한 색을 재현하는 감각 포화의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고독하고 느린 우울의 잔상이었다. 눈 앞에 직면한 실체들 사이에 분명 존재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사각(死角), 대상에 뿌리 내리고 자라났지만 감각적 실체를 갖지 않는 것들, 분위기, 아우라, 잔상, 상징적인 표피에 대립하는 실재, 풍크툼: 많은 이름으로 이야기 되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고정된 적 없는 선명한 현실의 그림자와 같은 것들을 검은 안료의 흔적으로 붙잡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책, 초, 저울이 자주 그려지는 것에 쉬이 납득이 갔다. 어두움과의 경계에서 부단히 측량하고 계몽하고 빛을 밝히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늘 어두움 곁에 있으므로,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 검은 무엇들을 잡아두기 위해 그림자를 드리우는 밝은 실체에 집중하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 실체들은 까만 어둠의 겹 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스스로 어둠이 되어 사라져버리고 만다. 어둠에 깔린 책들은 읽히지 않는다 (<책>, 2019; <무거운 책>, 2019). 작가가 오랜만에 검거나 희지 않은 색을 조심스럽게 입혀 보았다는 책 위의 돌은, 그 광휘 아래 더욱 선명해진 그림자의 짙은 무게로 책을 내리누고 만다 (<돌과 책>, 2019). 스스로의 몸을 녹여 불을 밝히고는 사라지는 초와 같이, 책은 스스로를 태워버리고 희뿌연 연기 아래 검은 공기보다 더 검은 재가 되어 버렸다 (<타버린 책>, 2018). 총명한 목소리로 세상에 질서를 밝히던 상징의 횃불들은 더이상 경계에서 빛과 그림자를 가르지 못하는 어둡고 둔탁한 덩어리의 잔상으로 그려졌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책들처럼, 검은 어둠 속 저울은 흡사 양 손 가득 짐을 진 십자가의 형상으로 희미하고 위태롭게 서 있다 (<저울>, 2018). 지배적인 빛이 부재하는 공간 안에서 대상은 그것의 그림자와 아직 시각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덩어리에 중량을 새기고 부정한 것들로부터 정한 것을 건져 올리는 심판자는, 마치 그 자신이 심판의 대상이 되었던 언덕 위에서와 같이, 아직 빛이 완전히 도달하지 않은 어둠의 경계 위에 연약한 몸의 잔상을 힘없이 드러낸다. 그런데 가만 다시 보면 그 검은 실루엣은, 빛이 도달하지 않은 언덕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여명의 그림자가 아니라, 한낮의 태양을 있는 힘껏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을 때 눈꺼풀에 맺히는 암조응의 검은 잔상에 더 가까워 보인다. 빛의 과잉으로서의 책과 저울은 그것을 바라보다 감은 눈 안쪽에 지연된 감각으로 표상되는, 빛 그 자체의 검은 양태로서 어둡게 그려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서윤아가 그리는 검은 이미지들은 밝은 현실 자체의 음화된 잔상이었다. 

 

 사실 멜랑콜리아 또한 마주한 타자의 무한함을 자기 안으로 끌어 안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하는 고통으로 중심에서 굉음을 울리며 돌아가는 기계 그 자체의 검음, 빛 스스로가 안고 있는 어두움이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그림자의 흔적이 통 눈에 띄지 않게 되어버린 후에도 멜랑콜리아는 한번도 사라진 적 없이, 활활 타오르는 현실 아래 짧지만 더욱 까매진 그림자 안에서, 너무 밝아져 버려 모두가 어쩔 수 없다고 똑바로 쳐다보지 않게 된 빛 안의 검은 잔상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서윤아는 그래서 작업실에서나, 낮 시간의 직장 한 켠에서나;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눈 앞에 보이는 것도, 눈을 감아야 떠오르는 것도; 부단히 검게 그려내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눈을 감는 것과 눈을 뜨는 것에 존재적 차이는 없다. 그래서 무릎과 손과 머리를 모두 바닥에 던져버린 얼굴 없는 사람이 무언가에 기도하고 (엎드려, 2019), 공기 속으로 녹아내린 듯 잠 든 사람이 힘없이 눈을 감고 있을 때에도 (낮잠, 2019); 부릅뜬 눈들은 글을 쓰고, 감시하며, 지혜의 빛으로 눈을 가린 손을 꿰 뚫는다 (눈으로 쓰는 글, 2018; 감시자, 2013; 지혜의 눈, 2012). 

  

“화면 위에 겹겹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검은 무엇들은 나의 암시이다. 나는 그저 검은 암시들 사이에 갇혀 사로잡힌 커다란 재료이다. 검은 무엇에는 경계나 구분이 없다. 단지 어렴풋이 있다는 자각일 뿐이다” -작가노트 중에서 

이민경: 물건들의 폐허에서 찾아야 할 무언가 

 

 벽돌, 철조망, 파이프, 각목, 단열재, 스티로폼 박스 등 일상의 어느 구석엔가 방치되어 천천히 침식되어가던 폐자재들은 작업실 안으로 불려들어와 빠르게 폐허의 풍경 속으로 가라앉는다. 작가는 수집한 폐기물들 위로 그 원형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콘크리트를 부어버리거나, 표면에 난 틈에 부드러운 밀랍을 채워 넣고, 형태가 무너질 때까지 캐스팅을 반복함으로써 대상에 붙어 있던 이름을 떼어 내어 버렸다. 표면이 범람하고, 균열이 침식 됨에 따라 구조는 그 위에 퇴적된 물성을 지탱하지 못한 채 무너져 버린다. 익숙한 형태와 함께 그 형태에 담지 된 질서가 무너진다. 이름과 그 이름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잃은 것들은 대상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한다. 

 

 작업실은 실로 죽은 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죽은 것들의 실험실에는 고무로 본 뜬 사물의 허물들이 축 늘어져 있거나,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스티로폼박스의 미이라가 푸석하게 말라 위태롭게 서 있다. 살색 실리콘을 기워 입힌 의자의 뼈다귀는 벼락의 소생술을 기다리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인형처럼 앉아 있다.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콘크리트 무덤에는 데스마스크 마저 씌워 놓았다. 일상의 제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하며 살아가던 물건들(objects)은 작업실에서 죽어 무언가(thing)가 되어 있었다. 그 무언가는 대상 안에서 효용과 가치, 의미와 이름을 읽어야만 하는 주체의 초조함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는 이의 의식에 등록되지 않는 이것들은 근본적인 타자로서 주체의 지평을 해체 시켜 줄 것으로 믿어졌다.

 

 ‘의도적으로 변형되는 과정에서 이질적 물질들이 섞여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상쇄된 채 물질성만 남은 조형물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을 엉성한 물질덩어리로 보여주며 의심없이 받아들이던 ‘일반적’인 상태 또는 그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작가노트)’. 대상을 규정하는 질서를 무력화 시키면, 이번엔 해방된 ’무언가’들이 그 반대편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를 우리의 질서로부터 구원할 것이라 믿어졌다. 그래서 비대한 껍질 밑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알 수 없고, 제 것이 아닌 피부에 둘러싸인 것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수 없는 답답함을 그 전복에 이르는 첫번 째 단계로 받아들이며 사물들의 죽은 무덤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이내 기능과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이질적인 덩어리들 앞에서 최초의 당혹감이 곧 경쾌한 물질들의 리듬으로 포용 되어짐을 느끼며; 대상화 할 수 없을 것 같던 무언가들로부터 다시 스스로를 구원하는, 주체의 끈덕짐에 놀라게 될 따름이었다. 

 

 주체는 쉽게 자신을 해제시키지 않았다. 대신 그 무언가들의 표면에서, 캡션에서, 드러난 퇴적물의 단층에서, 다시 그 이름없는 것들과의 관계를 설정해줄 실마리를 찾는다. 납득할만한 작업의 논리를 애써 찾으며, 무언가들의 소란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고자 한다. 과연 대상에 기입된 질서를 흐뜨러뜨리고 사물들의 폐허로부터 생경한 것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그 대상을 규정하던 주체를 해제하는 것이란 애당초 가능한 것이었던가. 생경함은 질서에서 무질서로의 낙차 안에서 드러났다 이내 사라지고 말아 버리지 않던가. 모든 것이 이름을 잃고 나면, ‘이름 없음’이 새로운 보편의 이름이 되어버리는 것 처럼. 이름들의 그로테스크한 죽음이 표면의 주름과 패턴과 돌기들 아래 완전히 잊혀지고 나면, 끈덕진 내 안의 주체는 표면의 이질감에서조차 파스탤빛의 조화로움을 찾아내 안도하고 마는 것이다. 

 

 종내에는 아름다움으로 환원되어 버리고 마는 덩어리들 앞에서 불편해지지 않는 불편함을 불평하다가, 작업에 대한 설명을 적어 놓은 노트를 닫아버리고서야 스스로가 쳐 놓은 이중의 덫을 마주할 수 있었다. 형태 없는 덩어리로부터 시작과 끝을 보고자 하는 나의 강박은 무덤 안에 묻어 두고 꺼내 보지 말아야 할 그 원형의 구조를 찾으며 죽은 질서의 흔적을 붙잡아 불편함을 느낄 것을 강요하는 동시에, 무언가들이 내는 소음을 차단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고 있었다. 주체의 구원을 위한 두 얼굴의 덫에 걸려 무언가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기이한 표면에 담긴 생기로운 리듬은 잠깐 열렸다가 이내 새로운 이름 아래 사라지고 말 것이다. 생경함은 익숙함이 박탈 될 때 잠시 나타날 뿐이다. 무언가들이 반짝이는 짧은 순간을 놓친다면 대상들의 죽음은 헛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 물질의 더미를 마주할 이들을 위한 캡션을 달아 놓으라 한다면, 저 주름과 돌기와 곰보들을 설명해줄 어떤 캡션도 찾으려 하지 말라 적어 둘 것이다. 

최모민: 다른 지금들로 풍경에 머무르기

 

 최모민의 회화 연작 안에서 장소는 다른 시간성을 갖는 풍경들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희끗한 하늘 아래 한 남자가 나무 속에 숨어 있고; 조금 더 어둑한 시간, 후드티를 뒤집어 쓴 이가 같은 풍경 속 그 나무 앞을 힘없이 걸어간다 (<쥐 잡기> 2019, <생각하며 걷기> 2019). 작가가 머무는 창작스튜디오 밖 빈터는 인물들이 걷거나, 쥐를 잡거나, 물을 뿌리고, 앉아 있는 무대가 되어 그 행위들이 일어나는 여러 지금들을 담는다. 다른 한 연작에서는 작가가 기거하던 아파트가 재건축 되는 현장의 낮과 밤이, 또 다른 연작에서는 작업실 근처 홍제천의 겨울과 여름이, 그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시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은 채 머무른 장소로서 반복되어 그려진다. 작가의 일과 안에서 반복적으로 경험되는 장소들은 그 곳의 여러 시점(時點)을 담은 풍경들로 연작 안에 머무른다. 

 

 창작스튜디오 밖 공터에서 보낸 여러 시간을 그린 최근의 연작에서는, 한 폭 풍경 속 한 인물의 중첩, 가령 나무 앞에 서 있는 남자와 그 그림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누워 있는 또 다른 그의 공재 (<그림자>, 2019), 그리고 나무의 한쪽 그늘에서 나를 응시하는 남자와 그 나무 반대편 가지 아래서 내 어깨 너머를 내다보는 또 하나의 그의 병존 (<얼굴들>, 2019) 이 눈에 띈다. 연작 안 여러 폭 풍경 안에 펼쳐져 있던 행위의 시간들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 은근하게 중첩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몸 없는 손들이 공터의 이곳 저곳에서 사부작 거리며 나뭇잎에 o/x 표식을 그리고, 커터칼로 나무 기둥을 깎거나, 호스를 잡고, 눈을 가리는 <새벽 (2018)>의 풍경에는 행위 하는 손, 그러니까 행위 그 자체만이 허공에 남아 스튜디오 밖을 사건의 시간들로 채우고 있지 않은가. 각기 다른 지금들로 풍경 안에 머무르는 행위들은 빠르게 지나가는 시점들의 잔상이 만드는 영화적 시간의 환상을 재현하는 걸까. 고정된 프레임 위에 축적되는 행위의 순간들은 마치 코믹 스트립의 그림 읽기처럼 서사의 시간으로 줄줄이 꿰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회화의 정지된 화면 안에 중첩 된 시간의 점들은 시간의 축을 내달리며 서사를 쌓는 이미지들처럼 방향성을 갖는 선형적 구조로 재구성되지 않는다. 한 장소에 얽혀 있는 여러개의 지금들에서는 (비교적 단순 명료하게 이야기의 구조가 드러나는 코믹 스트립과는 다르게) 필연적인 연속성의 순서나 개연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머무른 장소와, 그 장소에서의 경험을 공간적으로 연구할 뿐이라는 작가의 태도에서 더욱 확실해 진다. 그려진 장면들의 서사적 구조에 대해 침묵할 뿐 아니라, 되려 돌이 된 척하기, 그림자 되어보기, 보도블럭에 물주기와 같은 무목적적 행위들을 던져 놓곤하는 그에서는 미래를 향해 내달리게 하는 목적론적 중력을 훼방하는, 선형적 시간에 대한 태업의 의중마저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을 읽으려는 나는, 화면 이곳 저곳에 놓인 행위의 흔적들을 순차적으로 꿰어 보려 하지만, 서사의 축 저편에서 시간을 당기는 중력 없음으로 인해 다시 원점으로,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작가의 평면 속으로 회귀할 뿐이다. 이것은 신화의 질서가 모든 것에 제자리를 부여하는 코스모스적 공간으로의 회귀와는 같지 않다. 현재의 패러다임에 이미 기입되어 있는 선택지들 외의 모든 가능성들을 삭제해 버리는 자동화 된 질서의 세계 속에서, 여러 번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합리적 인과관계 밖 비가능성으로서 (비효율성으로서) 삭제된 시간들에 형태와 색채를 입혀주는 머무름이다.

 

 작가는 학부 시절을 회상하며, 한 주의 끝마다 퀘스트처럼 기다리던 과제의 압박 속에서 회화보다 빠른 호흡으로 서사를, 개념을, 정서를 풀어내기 위해 퍼포먼스와 영상 등의 타 매체들을 시도했었더라고 이야기 했다. 졸업 즈음에 이르러서야 주어지는 과제의 강박적 속도로부터 벗어나, 머무르고 응시하고 반복하는 온전한 자신의 속도로 작업할 수 있는 회화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회화의 시간성 안에서 선형적 시간의 폭압을 거스르며 풍경 안 이곳 저곳을 유영하는 작가 고유의 리듬을 재발견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퇴행적 행위 (작가노트)’는 그러니까 자꾸 한 곳으로 돌아와 가시적 현재 아래 감춰져 있는 많은 ‘지금’들을 열어보고자 하는 탈시간적 머무름의 의지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후드티의 남자가 걷고 있는 어둑한 풍경: 창작 스튜디오의 외벽 에는 지워지다 만 사다리, 나뭇잎의 흔적, 알 수 없는 얼룩의 조각들이 시스템 오류로 삽입된 이종의 풍경처럼 벽 위에 웅덩이를 그린다. 나무 안에 숨어 쥐와 대치하던 남자가 있던 그 그림 속 같은 벽과는 사뭇 다르다. 남자의 머리 언저리에 인물의 미니미(mini-me)가 떠있고 다른 차원으로 열린 창문이 느닷없이 삽입된 이 기묘한 풍경은,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서 지금을 독재하며 질주하는 현재로부터 균열을 찾고, 그 속에서 가리워진 많은 지금들의 가능성을 건져낸다 (<생각하며 걷기> 2019).

강가에 선 작가의 두 손 안에는 달의 상이 맺혀 있다. 그려졌다 지워진 몇개의 달들이 얇은 밤의 색 물감 아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지워지다 만 듯 하늘에 남겨진 달은, 손에 잡힌 달의 상과 강물에 비친 달, 그 시선의 끝에 놓여있는 또 하나의 달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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