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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버튼 니타, 박지희, 메리 매직
로지 기븐스, 루스 워터스, 수잔 레이시
전시기간: 2018. 9. 14 - 10. 21
관람시간: 화요일 — 일요일 / 12:00 ~ 6:00 pm
(월요일, 공휴일 휴관)

 

디자인: 김성구
사진: 조준용
영상자막: Pyke media


Artist: Burton Nitta, Jeehee Park, Mary Maggic
Rosie Gibbens, Ruth Waters & Suzanne Lacy
Date: 14 Sep - 21 Oct 2018
Hours: Tue — Sun / 12:00 ~ 6:00 pm
(Closed on Every Monday & Holidays)

 

Design: Sung Kim
Photo: Cho Junyong
Video subtitle: Pyke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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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RN WHERE THE MEAT COMES FROM

 

더이상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최소단위라고 여겨지던 개인(individual)은 오늘날 더 작은 요소들로 분해 가능한 몸 (dividual)이 되었다. 이것은 거대한 생산 시스템 속에 노동력으로써 연동되면서, 기능적으로 분절되어 이성의 제어에 따라 효율적으로 운용되는, 작은 기계라고 여겨지는 우리 몸을 말한다. 19세기 말 인체에서 발견된 (어쩌면 발명된) 호르몬은 혈관을 타고 몸 이곳 저곳의 기관들에 전달되어 활성화와 비활성화, 항진과 저하, 성장과 노화의 스위치를 누르는, 운영 체제의 명령 언어와 같다¹. 석류, 마늘, 굴 등을 둘러싼 여성성과 남성성의 미신들은 이제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의 화학식으로 분석되어 피임약, 배란 유도제, 갱년기 장애 치료제, 근육 증강제 등으로 복제되는데; 안면홍조, 수면장애, 피로감, 성욕감퇴, 발기부전 등의 출력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입력, 그러니까 폐경기 치료제, 멜라토닌, 스테로이드, 비아그라를 입력하면 된다. 유기체를 떠나 의학적, 산업적, 제도적 네트워크를 타고 처방, 유통, 통제되는 몸의 작은 복제품들은 그 거대한 생산 시스템에 연동된 우리의 몸을 소비자로 (소비재로) 재생산한다.

모든 것이 분석되면 모든 것이 향상될 것이라는 긍정적 동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은 늘 과부하에 시달리며 바이러스와 해킹에 취약하다. 자기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잠재적 적들은 스스로의 몸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기에 아주 유용한 장치이다. “몸은 나의 의지를 벗어난 공포의 대상이며, (그렇기 때문에/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몸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의약 산업과 웰빙 산업이 제공하는 온갖 무기들을 갖고 몸을 괴롭히는 데 일조한다”². 장기 곳곳에 도사린 잠재적 암세포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플라스틱들, 나의 세포들은 언제든 나를 배신할 수 있으며 과민한 나의 면역 장치는 나의 피부를 공격한다. 우리는 이제 영양제, 각성제, 진정제뿐만 아니라 피트니스 센터, 유튜브 헬스 채널, 포르노 사이트, 요가 센터, 클리닉, 명상 교실에 접속하는 통신 장비의 수신기로 살아간다. 산업적 전략에 의해 우리 몸에서 끊임없이 발견되는 (발명되는) 쾌락은, 기능적이고 아름다운 몸을 내세우는 섭생의 이데올로기가 우리 몸을 제어하는 거점으로 작용한다.

루스 워터스는 영상 What I Eat In A Day 에서 오늘날 미디어의 혈관을 타고 퍼지는 섭생의 강령이 글루텐 공포, 원푸드 다이어트, 디톡스 신드롬, 비만 혐오증과 같은 새로운 장애들을 등록시키는 현상에 주목한다. 건강과 미용을 위해 하루 동안 먹은 음식을 분석적으로 기록하는 블로거와 유튜버들은 섭생에 대한 수많은 이론, 마케팅 전략들, 체질에 대한 미신들과 의학적 가설들을 버무려 ‘소비자의 일상’으로 재생산한다. 깨끗하게 해독된 몸에 대한 예찬은 중독된 더러운 몸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키고, 주로 이러한 공포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값비싼 대체소비재는 나의 몸을 사랑하자는 캠페인의 이면에 몸에 대한 혐오를 확산한다. 우리의 몸 위에서 벌어지는 이 소리 없는 전쟁은 쾌락과 고통의 거점들을 가장 투명하고도 희망적인 언어들(‘깨끗한’, ‘순수한’, ‘맑은’, ‘균형 잡힌’, ‘건강한’, ‘고요한’)을 무기로하여 점령해 간다.

계몽주의의 기획은 오랫동안 잊혀 있던 몸을 재발견하여 근대적으로 정비된 주체에게 귀속시키는 듯 보였지만, 결국 이성적 격자 위에서 제작된 근대적 주체 또한 분석적으로 재단할 수 있는 통신장비의 소프트웨어에 다름 아니다. 각종 안정제와 항우울제 등으로 우리의 마음 역시 기능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는 성호르몬은 정체성의 신화를 해체할 가능성으로 잠복해 있다. 메리 매직은 영상 Housewives Making Drugs 에서 국가와 의약 산업의 통제하에 에스트로겐의 수급을 규범적, 경제적으로 제한당한 미국 내 트랜스 여성들의 고통에 주목하며, 처방전 없이 호르몬을 구할 수 있는 방안으로 몸에서 자연스럽게 배출되는 에스트로겐을 재활용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영상 속 두 트랜스 여성, 마리아와 마리아는 가상의 쿠킹 쇼 Housewives Making Drugs에서 자신의 소변을 가공하여 호르몬을 추출하는데, 자신의 몸에서 생산된 욕망의 기호를 입 안에 털어 넣는 이들은 자기 꼬리를 집어삼키는 전설의 뱀 우로보로스와 같이 시작도 끝도 없는 유토피아적인 몸이 된다.

폴 프레치아도(Paul B. Precidao)는 합법적인 의약 유통망 바깥에서, 그러니까 암시장에서 구입한 테스토스테론제를 의사의 처방 없이 투약하면서 ‘고정할 수 없는 철학적 주체’로서 『테스토정키』 를 저술 한 바 있다. 자신의 자전적 실험에 대해 쾌락을 통제하는 권력이 작용하는 분석적 장치들에 구멍을 내는 호르몬 해킹이라 정의한 그는, 정체성의 좌표 위에 주어졌던 육체의 한계 면으로부터 미끄러져 나옴으로써 이분법적 젠더 규범으로 고정할 수 없게 되었다. 프레치아도의 몸은 가시적이지만 포착할 수 없으며 살아있는 동시에 기호인, 모순적인 몸이다. 테스토스테론에 감응하는 그의 몸과 마음은 부정할 수 없이 실재하는, 그 질량을 가진 기호를 삼키며 만질 수 없다고 (그래서 거역할 수 없다고) 믿어지던 기계의 일부를 몸 안에 가득 채우게 된다. 호르몬을 향해 열린 그의 몸은 내부인 동시에, 외부인 네트워크만큼 확장되었다³. 메리 매직과 그의 친구들은 프레치아도가 시스템 밖으로 밀어내었던 바로 그 몸을 찾아내어 구조 밖에 현존하는 몸 자체를 찬양하는 불경한 축제를 벌인다. 시스템이 규정하는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이들은 거리낌 없이 '등록된 성’을 술에 녹여 마셔버린다.

버튼 니타가 주목한 태반 캡슐화 서비스 또한 이러한 몸과 마음을 관통하는 호르몬 해킹의 한 가능성이다. 사실 태반을 의료 쓰레기로 간주해 위생의 절차에 따라 폐기해 버리는 근대적 의료 시스템 바깥에는 소중한 천연 호르몬의 보고로써 태반을 재활용하는 ‘식인’ 전통이 존재해 왔다. 이제 태반에 붙어있는 신화적 오명 (인간의 몸에서 유래한 장기) 위에 가장 권위 있는 의약 산업의 옷 (캡슐)을 입혀 합리적이고 세련된 섭생의 표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이 서비스는 인스타그램의 매끈한 네트워크를 타고 퍼지고 있다 (#placentapills #placentaencapsulation #placentahuman). ‘유용한 자원임과 동시에 합리적인 소비 주체’라는 모순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소비자와 소비재, 또는 주체와 자원의 이분법으로 정의내릴 수 없는, 합리적인 시스템상의 국지적 오류로서 존재한다. 이들에게 더는 전통적 가치체계에 기반한 태반의 신성함(불경함)도 소변의 불결함도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몸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는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소변과 태반의 유용한 화학식에 즐거이 감응한다.

사물들과 서슴없이 성애 하는 로지 기븐스는 이처럼 극으로 치닫는 이성적 기계의 끝에서 발견되는, 구조와의 관계 속에 현존하는 몸 그 자체를 충실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영상 Domestic Bliss, Professional Body, 그리고 Brush 에서 타자(남성)의 시선이 주도해온 성 산업의 취향에 따라 정형화되고 상품화된 성행위의 도식들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타자가 명백하게 부재하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그 도식의 맥락과는 동떨어진 채 구조 속에서 작동하면서 구조를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온 몸으로 구조를 받아들이며 땀 흘리고, 긴장하고, 흔들리고,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녀의 몸은, 타자의 시선으로 여성의 성행위를 규정해온 구조를 부정하기 위해 우선 그 타자의 명분과 다름을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했던 전 세대의 이데올로기적인 몸들보다 더 ‘그 자체로 몸’인 몸이다. 전통적 페미니즘의 의식에는 불경스러워 보일지도 모르는 그 구조의 강박적 소비를 통해 로지 기븐스가 표방하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자아를 배양시키던 그 구조와 어쩌면 그래서 그녀에게는 자연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는, 굳이 변증법적으로 나뉘지 않는 문화 속에 현존하는 나의 몸의 발견일 것이다.

서사를 분절시켜 도식화한 행위들로 조각낸 그녀의 이 ‘몸(들)’은 기존의 ‘수동적 여성의 몸’이라는 지배적 서사에서 떨어져나와 몸 자체의 여러 가능성, 가령 가학과 피학의 순환적인 관계성, 들을 발굴해낸다. 다양한 페티쉬의 범주들로 분류되고 상품화되어 네트워크를 표류하는 현대의 평면적 성애 루틴은 도식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현실적인 몸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만드는데, 여기에 행위의 엄중한 맥락은 사라졌고 남아있는 것은 구조의 안팎을 맴도는 또 다른 의미의 유토피아적인 몸 (구조의 내부에서는 찾을 수 없는 몸)이다. 현실에서 어떤 기능이나 위엄과도 무관하게 남겨진 폐허의 아궁이 자리에서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이 유토피아적인 몸은 열심히 구조를 가지고 논다. 중요한 것은 누가 구조를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다.

수잔 레이시는 그녀의 1976년작 Learn Where the Meat Comes From에서 소비자이자 주방에 선 여성으로서 고기를 언어로 절단하는 자신의 몸을 통해 양립할 수 없는 어떤 모순의 경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상 속 그녀는, 양의 사체를 부위 별로 분절(articulate)하여 식도락의 소비재로 양산하는 기호들(고기의 컷)을 양의 몸과 자신의 몸에 번갈아 덧씌운다. 그 과정에서 점점 도마 위의 동물처럼 행동하는 레이시는, 아마도 주어진 기호들을 몸에 완전히 각인한, 그리고 (그래서) 소비자와 소비재 사이의 무의미한 경계를 지워버리고 다시 몸 그 자체로 회귀하는 오늘날 우리의 숙명을 예견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 고기를, 그러니까 형태와 윤곽과 밀도와 무게를 가진 몸을 발견하고 이름 붙이라는 명령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듯 자신의 몸 안에 고기를 재단하는 이성적 언어를 쑤셔 넣는다. 고관절의 동그란 뼈에서 이어져 내려가는 허벅지 뼈를 둘러싼 힘줄과 근육으로 가득 찬 그 다리 살은 이미 고기만큼이나 많은 이름으로 가득 차 있다.

도축자의 언어와 도마 위의 고기, 프랑스산 와인의 역사를 읊는 교양인과 본능적으로 고기를 물어뜯는 야수의 사이를 넘나드는 그녀는, 이성적 언어가 가장 정교해지는 순간들에 야성을 드러내며 근원적 유토피아로서의 몸 (언어 이전의 몸)으로의 회귀를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언어 이전의 몸과 언어의 몸 사이를 유희적으로 오가는 그녀는, 오히려 그 둘 사이의 변증법적 문지방을 넘나듦으로써 그 경계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밟아 문질러 없애고 그로부터 다양한 몸의 가능성 (예컨대 언어를 가득 삼켜버린 몸, 이성의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몸, 구조의 가장 깊은 지점에서 구조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몸, 구조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구조에 앞서 실존하는 몸들)을 제시한다.

이 전시는 수잔 레이시가 그녀의 주방에서 던져 놓았던 몸의 화두들에 현재의 몸으로 대답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이야기이다. 이미 타자로 분류된 몸들을 중심으로 지난 수십 년간 이성적 장치와 몸의 관계의 정당성에 의문을 던지는 담론이 활발하게 생산되어 왔다. 이제 몸을 통제하는 이성적 장치들이란 주방에 선 몸, 여성, 소수자, 배제된 이들만의 화두가 아닌데, 폭발적으로 확산하는 기술이 모든 몸을, 그러니까 이성적 주체까지도 분석과 배치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쾌락의 장치들은 더이상 가부장의 몸과 어머니의 몸을 구분 짓지 않으며, 소비 자체를 생산하는 시스템 속에 소비자를 위해 마련된 특권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는 박지희의 고기들이 있다. 건축물과 그 안에 배치된 무기력한 몸들의 구조적 관계를 표상하는 박지희의 기생하는 구조 (창경궁로 35가길12) 는 고기들을 꼬챙이에 꿰어 전시장의 드러난 구조에 연결시켰다. 이 고기들은 이제 생체에너지를 유용한 전기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전지의 한 극으로서 이 전시기계에 등록되어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전기를 생산해 내며 (사실은 담론을 생산해 내며) 부패해 갈 것이다. 이 구조를 구상하는 작가조차 고기의 부패한 냄새가 얼마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데, 이런저런 사전 방부 처리에도 불구하고 박지희의 지난 고기들은 다른 기관의 전시장에서, 그녀의 작업실에서, 각기 다른 조건 속에 다르게 썩어들어간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박지희와 그리고 전시를 ‘구조 짓는’ 우리들은 우리의 기획에 따라 서사를 생산하고, 해석하고, 유희하면서 저 타자의 몸들을 동파이프에 묶어버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포섭한 몸들에 대한 최소한의 구조적 의미 부여를 제외하고는 어떤 근본적인 통제력도 갖고 있지 않다. 꼬챙이에 꿰여 무기력해 보이던 고기들은, 이제 구조적 장치들 너머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들 속에서 기묘하게 살아난다. 현상 이전에 있는 구조보다, 더 먼저 그리고 더 묵직하게 존재하는 몸 그 자체로 말이다.

 

¹ ‘이제 숙면을 취할 시간입니다’ ‘그만 좀 드십시오’ ‘우울해 말고 활짝 웃으십시오’. 무려 100조 개의 세포로 이뤄진 인체는 이 작은 목소리에 의해 움직인다. 호르몬. 혈관에 분비되면 몇 분에서 길게는 몇 시간 후 불꽃처럼 사라지며, 감자튀김 10톤 속에 들어 있는 소금 알갱이 하나의 양만큼 작은 체구를 지녔지만, 호르몬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어느 날 아침 거짓말처럼 피부에 윤기가 사라지고 생리를 건너뛰기 시작했다면 호르몬이 바닥나고 있다는 뜻이다. 불면증과 우울증은 물론 허리 사이즈나 혈당 지수도 모두 호르몬과 밀접하다. 레이저 리프팅이나 지방 재배치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젊은 얼굴을 갖고 싶은가? 보이지 않는 혈관, 뇌, 내부 장기까지도 싱싱하게 유지하고, 늘 즐겁고 의욕적으로 살고 싶은가? 호르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길. 삶의 질을 바꾸는 젊음의 샘, 안티에이징 호르몬의 모든 것이 여기 있다.’ (출처: 보그 코리아. http://www.vogue.co.kr/2017/09/04/hormone-harmony/?_C_=11)

² 실비아 페데리치, 〈In Praise of the Dancing Body〉, STRIKE!, (18).

³ 미셸 푸코는 <유토피아적인 몸>에서 유토피아적인 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러면 몸은 자신의 물질성, 자신의 살덩어리 속에서 그 자신의 환상의 산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결국 춤추는 사람의 몸이란 바로 몸의 내부인 동시에 외부인 공간만큼 확장된 몸이 아닌가? 마약중독자나 신들린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LEARN WHERE THE MEAT COMES FROM

 

An individual, which has been long believed to be in-dividable, is now understood as a body that is dividable. Our bodies as the dividual are small machines systematically analysed and operated to be synchronised with the massive structure of production as labour power. Hormones discovered (or rather invented) in the late 19th century are the operation language that flip the switches of activation/deactivation, increase/decrease, and growth/age. The mythologies of femininity and masculinity embodied in pomegranates, garlic and oysters are now analysed into the chemical formulae of sexual hormones. Therefore outputs of hot flush, sleep disorder, fatigue, decrease of sexual desire, erectile dysfunction can be mechanically commanded by the inputs of menopause treatments, melatonin, steroid, and viagra. These micro replica of our organic matters have left our bodies to be prescribed, circulated and controlled by the medical, industrial and institutional network; and reproduce our bodies into consumers/commodities.

Despite the techno-utopian motivation that seemed to have promised ‘things will get better when everything is analysed’, our bodies are far from being well: we are overloaded, vulnerable to viruses and hackers. The idea of a body as a host of potential micro-enemies is a very useful device to aggregate fear and anxiety on our own bodies. “Our body scares us, and we do not listen to it. We do not hear what it wants, but join the assault on it with all the weapons that medicine can offer (Silvia Federici,).” Cancer cells are dormant in my organs; micro-plastics contaminate my blood; my own cells can possibly betray my survival; and my irritable immune system is already attacking my skin. We access to supplements, vitamins, stimulants, sedatives, gyms, yoga classes, clinics, and meditation camp to continue our lives as a receiver plugged into the big information machine. Pleasure (the other side of the fear) is discovered (invented) as part of the industrial strategy, and is the operation point of the ideology of well-being which promotes the pleasurable and functional body.

Ruth Waters in her video What I Eat In A Day focuses on the contemporary phenomena of newly registered disorders such as gluten phobia, one-food diets, detox syndromes, and obesity hatred. Beaty and health bloggers and YouTubers who analytically record what they have eaten in the day take theories, marketing strategies, mythologies on physical constitutions and medical hypothesises and mould them into the daily lives of consumers. The praises on the pleasure of clean, detoxed bodies diffuse fear on filthy bodies; and the costly alternative commodities suggested as the solution for the fear proliferate disgust on our own bodies. In this silent war on our bodies, the points of pleasure are seized by the most transparent and hopeful language such as ‘clean’, ‘pure’, ‘balanced’, and ‘tranquil’.

It seemed that the project of the Enlightenment had rediscovered the long-lost corpus and reverted it to the updated modern subjectivity, however, the modern subjectivity had been produced on the grid of logos and are no more than a software of the communication device. The mind is mechanically controlled by sedatives and anti-depressants, while the rigid myth of identities is being deconstructed by the sexual hormones that command the flow of desire. Mary Maggic in its video Housewives Making Drugs focuses on trans women in the US who are economically and institutionally marginalised and restricted on their access to Estrogen. On searching a way to get their hormones without prescription, Maria and Maria in Maggic’s video demonstrate how to recycle Estrogen that is naturally discharged from our bodies: they extract the hormone from Maria’s Urine. Maria and friends swallow the shots of ‘code-desire’ originated from their own bodies, like Ouroboros who swallows its own tail. Their bodies have no end nor beginning.

Paul B. Preciado has authored Testo Junkie(2013) as a transitioning philosophical subject while self-injecting black market Testogel without following the medical protocol based on binary gender norm. Preciado has defined his auto experiment as a hormone-hacking that punctures the analytical system of the power that controls and extracts bodies. Preciado’s self-intoxicated body has slipped out from the given identity, and negates the binary gender norm by re-presenting the body according to her(his) own desire. His(her) slipping body is simultaneously visible and incomprehensible, transparent and opaque: a contradicting body that is a life and a thing. T intoxicated Preciado, by being affected by the molecule that is a mass and a code, has filled the corpus with the machine that had once been believed to be intangible (and thus absolute and authoritative). Here, Maggic and its friends have found the utopian body that Preciado had pushed away from the system: they dissolve the ‘registered gender’ into shots of gins, and have a profane celebration of the mystic bodies that are dis-identified from the system.

Placenta Encapsulation Service highlighted in Burton Nitta’s journal After…Birth is suggested as another tactic of hormone hacking. In fact, outside the modern medical system have always been traditions of placenta-cannibalism through which people recycled the hormones rich in placentae. Placenta Encapsulation Service reinvents the filthy witchcraft-y placentophagy by putting the processed placenta in the most authoritative outfit of the slick pharmaceutical capsules. Recently the service has been flashing on the net of Instagram (#placentapills #placentaencapsulation #placentahuman). As being ‘a useful resource and simultaneously a rational consumer’, a subject of the placenta-cannibalism is a contradicting being that cannot be defined in the logic of the binary of consumer/commodity or subject/resource, and thus locally neutralises the logos based on the binary. For these traversing bodies, placenta and urine are neither sacred nor filthy. Ironically by only listening to the voice of corpus, the liminal bodies grasp the reasonable chemical codes for their own pleasure.

Rosie Gibbens who simulates sex with ordinary objects shows another possibility of the utopian body found deep inside the structure: the body that exists parallel to the sexual codes structuring female body. In her videos Domestic Bliss, Professional Body, and Brush, Gibbens performs the choreography of sex schematised and commercialised by the sex-industry led by the male gaze. In the scenes absent of male partners, her body still takes the contextless manuals of sexual labour: operated by the structure, the performing body is trembling, concentrated, blushing and intense. Her body, compared to the political bodies of the previous generation that had to constantly identify the ideology of the others (male gaze) and their difference, is closer to the body itself. Through this obsessive consumption of the codes which might seem to be a blasphemy to the traditional feminist point of view, Gibbens is perhaps trying to find the really existing body in Culture that she was born and raised as a subject, and therefore not in a binary opposition to Nature.

The schematised performance deconstructs her body as a living narrative of ‘passive feminine body’. Now her fragmented body can try this and that possibilities, such as the cyclic relationship of sadism and masochism. Gibbens’ tangible body is accentuated in these flat sexual routines that are commodified and categorised into numerous different fetishes. The rigid context of the action is gone, and what remains is another utopian body (a body that is not found inside the structure) wandering inside and out of the structure. This corporeal body, like a little girl playing in a ruin, plays with the obsolete structure, paying no attention to the architect who had once built and occupied the ruined structure.

Suzanne Lacy in Learn Where the Meat Comes From(1976) represents herself as a consumer, a cook and a butcher who articulates the meat with his language. Lacy in front of a lamb on a cutting board imposes the code of culinary commodities (cuts of meat) on the lamb’s carcass and on her own body simultaneously. By assimilating herself to the meat on the cutting board, the artist have foreseen our fate today: we, who have embodied given codes (of gender, of consumer, and of language) on our body have became the codes ourselves, standing on the blurred threshold between the consumer and the commodity, or the name and the meat. As she stuffs the language into her body: the dense, heavy, spacious, and corporeal body is filled with languages as many as the cuts of meat.

From the butcher’s language to the meat on the cutting board, or from the culinary elite to the beast who chomps the meat; Lacy seems to move towards the utopia of infancy where the language had not yet arrived. However, her body that shifts between the body of language and the body before language rather blurs that dialectical threshold by crossing the boundary again and again. Her liminal body shows utopian possibilities such as a body stuffed with language, a body as a commander of language, a body that can subvert the structure from deep inside the structure, the body that wanders inside and outside the structure, and the body that exists before the structure.

The exhibition Learn Where the Meat Comes From represents the contemporary bodies that reply to the topics that Lacy has unwrapped in her kitchen in the 70s. Already for decades, bodies of Others have been actively engaging in the discourse that questions the legitimacy of the structural power over corpus. Now the issues of the structural controls are not limited to the bodies of kitchens, minorities, or the excluded. The accelerating capitalist and institutional apparatus are objectifying all bodies, and the structure doesn’t distinguish the patriarch’s body from the mother’s body anymore. In the system that profits from the consumption itself, there is no privilege saved for consumer over commodity.

And here, in this space are the meat that Jeehee Park installed on an exposed water pipe of the gallery of out_sight. These meat constitute one pole of her chemical batteries that transforms the organic energy of the carcasses into useful electric energy. Trapped in this exhibition-machine, these meat of Park’s Parasitic Structure-12, Changgyeonggung-ro 35ga-gil will decompose while producing electric energy (or in fact, producing narratives and discourse). Even the artist who is structuring this power plant cannot tell how much the decaying meat will stink: in another gallery and in her studio, even after this and that preservative treatments, the meat have decomposed in unpredictable ways under different circumstances.

Park and us who are structuring the exhibition, producing narratives, interpreting other bodies have skewed the bodies on the structure of the building. Nevertheless, except for ascribing the minimal structural meaning to the meat, we have no fundamental control over the corpus. The lifeless bodies that are skewed on the pipe are coming into uncanny beings in the unpredictable possibilities beyond the structural devices. These weighty meat are here at the moment, not transcended by structure, rather transcending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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