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 구동희 개인전 <딜리버리> 리뷰
전시는 무언가가 배달되는 환경을 환기시킨다. 전시된 두 개의 영상은 배달되는 것들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것들이 유통되는 채널의 풍경을 빠른 속도로 전개한다. 전시장의 내부로 걸어 들어가면 곳곳의 기둥으로부터 파생되는 살구색 가벽과 계단이 시선과 몸의 움직임을 유도한다. 전시장은 하나의 큰 동선이 되고, 동선을 따라가는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 이동되어지는 것으로서 그 유통 구조의 내부를 체험하게 된다.
동선 위에는 종이컵이나 일회용 식기들, 그리고 배달음식의 이미지들이 장식적이고 추상적인 조형물의 일부를 이루며 전시되어있다. 원 맥락으로부터 이탈하여 자의적으로 왜곡, 변형된 이 표상들은 일상적인 구조로는 도통 설명되지 않는다. 전시장 안에 놓인 것들로부터 시선을 올려보면, 아트선재센터의 건축 구조로부터 연장되는 이 유통경로의 모형은 사실 ‘전시장’이라는 미술 유통의 물리적 도구 그 자체를 지시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틀 안에 담긴 것이 보이지 않게 되면 틀 그 자체가 시야의 중심에 놓인다.) 그래서, 어쩌면 너무 자명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전시를 매개로 관람객에게 배달하는 것은 결국 자의적 이미지로서의 미술이 유통되는 망, 전시 그 자체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전시가 권장하는 전시장 안에서의 신체적 경험은 다른 특별한 무언가로의 이동이 아니다. 전시 <딜리버리>는 전시장이라는 전시의 공급자 (기획자와 작가)와 관객 사이의 물리적 공간과 시간에 대한 경험 자체를 재환기시키는 자기지시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이 정교한 이중의 개념적(제도적) 구조 속에서 관객에게 주어지는 실제의 전시 경험이 전적으로 아무 단서를 드러내지 않는 작가의 내적 상징체계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점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거나 혹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결국 ‘전시를 경험했다’는 말 이외에 딱히 이 경험을 구조화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관람객은 동선의 군데군데에서 익숙한 배달의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기뻐할 따름이다. 그런데 일상적 구조를 교란시키는 전시공간의, 그리고 현대미술의 이러한 일방적인 (그리고 다분히 계몽적인) 전략 안에 던져짐에도, 오늘의 관람객은 작가가 던져 놓은 유희에 별다른 동요 없이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맥락으로부터 이탈한 자기지시적 이미지들이 일상적 의미망이 정지되는 틈 사이로 소음처럼 드러나는 구조의 예외상태를 미술관의 안과 밖에서 이미 익숙하게 목격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외부적 참조점으로부터 단절된 파편적 레퍼런스들만이 떠다니는 오늘의 많은 전시들 뿐 아니라 이미지 자체가 의미의 지지체로서 무한히 증식하는 짤방의 환경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매일같이 시뻘겋고 기름진 음식 사진으로 포화된 배달 앱을 열고 상상 가능한 모든 미식의 가능성에 탐닉하지만, 사실 배달되어 오는 것은 비슷하게 달고 짜고 매운 전형적인 자극의 미미한 변주들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결국에는 중국집에 전화해 늘 먹던 짬뽕을 주문하게 될지언정 일단 정오에 가까워지면 배달 앱을 열고 푸드 포르노에 빠져들곤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소비한다는 것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전시 <딜리버리>는 전시를 소비한다는 것, 파편화된 심미적 이미지들에 대한 체험의 장 그 자체를 다소 불친절하게 배달하며 이런 오늘의 풍경을 넌지시 드러낸다.